기억은 인간의 정체성과 경험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지우고 싶은 기억도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사고, 트라우마, 실연이나 상실 같은 감정적 상처는 오랫동안 사람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억을 지운다’는 과학기술은 오랫동안 영화나 소설의 소재로 다루어져 왔지만, 최근 뇌과학과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이 가능성이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우거나 변형하는 기술은 실제로 존재하며, 그 연구는 점점 정밀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술이 실제로 사용될 경우, 과연 윤리적으로 정당한가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또한 기억을 삭제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 사회적 책임, 법적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합니다.
1.기억 삭제 기술, 어디까지 왔는가?
기억 삭제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주로 신경과학과 정신의학 분야에서 진행되어 왔습니다. 특히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를 위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기억 형성과 저장에 관여하는 뇌 부위인 해마(hippocampus)와 편도체(amygdala)는 특정 감정이나 경험이 뇌에 각인되는 핵심 역할을 하며, 이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트라우마를 완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방법 중 하나는 약물 기반의 기억 수정입니다. 대표적으로 프로프라놀롤(propranolol)이라는 베타 차단제가 연구되고 있습니다. 이 약물은 원래 고혈압 치료제였지만, 특정 기억을 떠올리는 상태에서 복용하면 그 기억에 대한 감정 반응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음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기억 자체를 완전히 삭제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뇌에 미치는 정서적 영향을 약화시키는 방식입니다.
또한 전자기적 자극을 통한 뇌 자극 치료도 연구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경두개 자기자극(TMS)은 특정 뇌 영역에 전자기 펄스를 가해 뇌 활동을 조절하는 기술로, 특정 기억의 인출이나 강화, 또는 억제를 가능하게 한다는 실험 결과도 보고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동물 실험 단계에서, 기억을 저장하는 뉴런 집단인 엔그램(engram)을 조작하여 특정 기억을 지우거나 바꾸는 연구가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아직 극복해야 할 기술적, 윤리적 장벽이 존재합니다.
2.기억을 지운다는 것, 윤리적 선택인가?
기억 삭제 기술이 현실화되었을 때, 과연 그것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요? 표면적으로 보면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는 것은 개인의 권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은 단순한 정보의 저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성격, 관계, 도덕 판단, 그리고 삶의 방향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요소입니다.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단순히 ‘괴로움을 없애는 것’만이 아니라, 그 기억으로부터 배운 교훈이나 감정의 맥락까지도 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실연의 아픔을 지우는 것이 순간의 고통을 덜어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인간관계에 대한 성숙한 통찰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자율성과 책임의 문제도 제기됩니다. 기억이 지워졌을 때, 그 사람은 동일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범죄 피해자나 가해자의 기억이 삭제되었을 때, 그들의 법적 책임이나 증언의 신뢰성은 어떻게 보장될 수 있을까요? 인간은 경험을 통해 성장하며, 그 경험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두 개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기억 삭제는 곧 ‘나’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며, 이는 곧 인간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처럼 기억 삭제는 단순한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윤리적 고민을 동반해야 할 문제입니다. 기술이 가능하다고 해서 반드시 허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사회적, 도덕적 파장까지도 고려한 ‘선택’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3.기억 삭제 기술, 사회적 위험은 없는가?
기억 삭제 기술이 개인의 고통을 줄이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기대도 있지만, 이 기술이 사회적으로 악용될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기억은 진실을 담고 있는 기록이며, 사회적 관계, 범죄 수사, 역사 인식 등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권력이나 기업이 이 기술을 악용하는 경우입니다. 특정 사건의 기억을 지우는 방식으로 진실을 은폐하거나, 집단적 트라우마를 제거하여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인 기억조차 지워진다면, 그 사회는 반성과 교훈의 기회를 잃고 동일한 실수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억 삭제가 소비화될 경우, 인간의 감정조차 ‘불편한 것’으로 치부되어 기술로 처리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습니다. 이는 정신건강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보다는 임시방편으로 덮어버리는 방식이며, 사회 전체의 정서적 회복력을 약화시킬 우려도 있습니다. 법적 문제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가 기억을 삭제했을 경우 범죄에 대한 증언이 불가능해지고, 가해자도 자신의 기억을 지웠다는 이유로 면죄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법적 시스템 전체를 위협할 수 있으며, 기술의 남용이 곧 정의의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따라서 기억 삭제 기술은 철저한 규제와 윤리 기준, 사회적 합의 속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단기적 편익보다 장기적 영향과 인간다운 삶의 기준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기억 삭제 기술은 이제 더 이상 공상과학의 영역에 머물지 않습니다. 과학은 점점 기억을 조작하고 지우는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으며, 이 기술이 실제로 사회에 도입될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그러나 기억은 단지 지우고 싶은 데이터가 아닌,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입니다. 과학이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기술의 진보보다 더 빠르게, 그것을 둘러싼 윤리와 철학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